광고

[데스크 칼럼] 대법원장이 부른 '백성', 세종의 수사인가 시대의 착시인가

김영욱 | 기사입력 2026/09/17 [17:59]
특집/기획
[데스크 칼럼] 대법원장이 부른 '백성', 세종의 수사인가 시대의 착시인가
기사입력: 2026/09/17 [17:59] ⓒ 성남피플
김영욱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뉴스공장 캡쳐화면   © 성남피플



지난 16일 제1회 세종법률문화상 시상식. 조희대 대법원장은 기념사에서 "법과 제도가 단순히 통치의 수단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돌보고 보호하는 데 쓰여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대왕의 민본사상과 애민정신을 언급하며, 훈민정음 창제를 글을 모르는 이들도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게 한 법적 약자 보호의 사례로 든 자리였다. 발언 취지만 놓고 보면 나무랄 데가 없다. 법이 지배의 도구가 아니라 보호의 도구여야 한다는 것, 누구도 법의 보호에서 소외돼서는 안 된다는 것—사법부 수장의 입에서 나올 법한, 아니 마땅히 나와야 할 말이다.

 

그런데 이 발언을 받아쓴 언론사들 사이에서 흥미로운 균열이 생겼다. 서울신문, 네이트뉴스, 스포탈코리아 등은 그의 발언을 "백성의 삶"으로 인용했고, 경향신문, 세계일보, 아시아경제, 머니투데이, 데일리안 등은 같은 취지를 "국민의 삶"으로 인용했다. 실제로 대법원장이 세종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시대적 어휘로 "백성"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 해도 이 균열 자체가 질문을 던진다—사법부 수장의 공식 발언에서 "백성"과 "국민"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뒤섞여도 되는가.

 

이 두 단어는 동의어가 아니다. 백성(百姓)은 원래 성씨를 하사받은 지배 계층을 가리키던 말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다스림을 받는 존재, 즉 통치의 객체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조선시대의 백성은 정치적 의사결정의 주체가 아니라 교화와 보살핌의 대상이었다. 반면 국민은 근대 국민국가와 함께 등장한 개념으로,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이 명시하듯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담은 말이다. 하나는 다스림을 받는 자이고, 하나는 원칙상 다스림의 근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조 대법원장의 발언이 아무리 선의로 읽힌다 해도 언어 감각의 문제는 남는다. 대법원장은 다른 누구보다도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제1조를 매일 해석하고 수호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세종의 애민정신을 빌려오는 것과, 그 수사 속에서 "백성"이라는 피치자(被治者)의 언어를 21세기 사법부 수장의 입으로 다시 소환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한 말이라도, 국민을 향해 "백성"이라 부르는 습관은 국민을 보호와 시혜의 대상으로 놓고, 사법부를 그 위에서 내려다보며 베푸는 자리로 놓는 무의식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법을 국민 위에서 "돌보고 보호"하는 시혜로 그릴 것이 아니라,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국민의 이름으로 행사하는 것으로 그려야 할 자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발언 하나를 근거로 대법원장이 국민을 신민으로 여긴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실제 발언의 맥락과 취지는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오히려 환영할 메시지였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아쉽다. 좋은 메시지가 낡은 언어에 담기면, 메시지의 진정성까지 의심받는다. 사법부의 언어는 늘 헌법의 언어와 나란히 가야 한다. 다음번엔 "백성"이 아니라 "국민"이라고, 정확하게 말해주길 바란다.

ⓒ 성남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TOP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