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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나”

서평 -평안도이야기

김영욱 | 기사입력 2024/06/20 [12:58]
특집/기획
백석, “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나”
서평 -평안도이야기
기사입력: 2024/06/20 [12:58] ⓒ 성남피플
김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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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평안도이야기

한국근대 문학 기행. 김남일 지음

 

 

▲ 평안도이야기 책 표지  © 성남피플

 

이야기는 1900년대부터 1945년 해방의 풍경을 담고 있다. 당시 문인들이 그려낸 소설아니 시, 언론기사로 근대를 살펴보고 있다.평안도 대동강으로 압록강으로 선천의 105인 사건과 성천의 눈발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동학도의 투쟁에서부터 1931년 만주사변과 37년 중일전쟁의 시기 평안도 백성들의 삶은 또 나라잃은 식민지 백성과 문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던가?

 

젊은시절 독립의 열망도 중일전쟁 시기 일본의 파죽지세에 새상은 이미 대동아공영의 일본세상이고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 전향한 문인들...이광수, 백철...

감자의 작가 김동인은 한량이라고 했다. 부모가 물려준 가산을 탕진해가며 기행했다고 했다.

메밀꽃필무렵의 이효석은 서구주의에 경도된 팔자좋은 사람이었다. 숭실에서 교수하며 새르팡이라는 다방을 즐겨찾아 클래식과 커피를 즐겼했다. 서구의 꽃은 팀했다.

 

개인의 취미를 뭐라 할 것은 없으나 지식인이나 선비는 민초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해서 세상을 변화시키기에 힘써야 옳은 것이 아닐지... 작가는 이런 문학 지식인을 옹호하지나 또 애써 날을 세워 비판하지 않는다. 그들의 작품과 처신을 담담히 그러낼 뿐이다.

 

책은 평양을 가장 많이 이야기 하고 있다. 대동강, 보통강, 대동문, 기자묘, 칠성문의 거지소굴,기생학교. 대동강의 불꽃놀이와 기생 금패 이야기... 일본인의 관공코스로 기생학교를 안내문에 실을 정도였으단다. 정태춘이 노래한 은어와 기생관광은 1980년까지 계속되었다.

 

평양감사가 되면 우선 기생을 점고했다고 한다. 풍류가 있는곳. 그러나 평양감사는 대게가 가렴주구다. 그래서 평양사람들에게는 염라대왕이 둘이라고 했다.부임하면 꿩사냥부터 했으니 말이다.

1811년 처진 홍경래의 난은 이런 오랜 서북차별의 결과이며 필연이었다.

 

내가 십 수년전 잠시 문이 열렸던 평양 아리랑 축전을 보고자 방문한 평양..유경호텔과 옥류관의 단고기와 냉면, 묘향산 산행과 칠색송어회.... 밥 많이 먹으라던 안내원....물살이 거샜던 깁믄

 

난세에 어떤 삶이어야 하는가?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지금은 난세인가 일제 식민시대와 무엇이 다른가?

그래도 국가정체를 갖고 자신의 수장을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 뽑는다.

현대의 가렴주구는 부동산업자, 자본가들,,,관료들과 검사,판사,의사의 사 짜 돌림의 무리들이다.

노동자는 어떻했는가? 체공녀 滯空女 강주룡이 있다.

 

내레 선교리에 있는 평원고무 공장의 직공 강주룡입네다. 회사 측은 이번에 돌연 불경기를 구실로 임금을 삭감하겠다고 통보해 왔시오. 우리는 회사즉의 삭감 조치를 받아들일 수 없습네다. 이것은 비단 우리 공장 마흔아홉 명 파업단만의 문제가 아니로. 우리가 이를 용납하면 평양의 2300명 고무 직공의 임금 삭감도 불을 보든 뻔한 일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구기로 반대하는 것입네다. 내레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하여서는 목숨도 초개처럼 버리는 게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거이 가장 큰 지식입네다.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에 올라왔지요.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내레 곧 떨어져 죽을 뿐입네다.”

1931529일 새벽 평양 을밀대였다.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 투쟁에 불이 붙었다.

강주룡은 이후 평양적색노동조합 사건에 연류되어 투옥 1년간 미결수로 있으면서 얻은 신경쇠약과 소화불량증세로 32813일, 병원 한번 가보지 못하고 평양  빈민굴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 을밀대 농성중인 강주룡과 아래 평양 고무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  © 성남피플



조선민들은 먹고살기 위해 혹은 정치이유로 압록강을 건넜다. 만주국 간도에 정착했다. 육당 최남선은 이성계를 질타한다. 모처럼 최영장군이 북방으로 조선을 펼칠 대륙진출 기회를 태조의 개인영달 -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은 반도자루에 갇히였다고 개탄했다.

백석은 1940년 암울했던 조선을 뒤로 하고 압록강을 건넜다.

 

<북방에서 -백석>

 

아득한 녯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금은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녯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녯 한울로 땅으로―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늘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해방은 소련군의 만주국 진주를 기화로 시작됐다. 당시 만주국은 조선영토의 6, 인구는 2천만에 달했다. 살아남기 위해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들, 그러나 내부의 차별은 존재한다. 압록강을 넘어온 조선인은 압록강 이남 사람들은 차별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일본인은 일본 내지인이 차별했다. 만인에 대한 만이의 투쟁.

 

일제 강점의 출발은 동학도의 토벌을 빌미로 청일의 조선에 들어와 동학도를 몰살하고 일제의 군화발아래 놓이게 됐다. .조선왕조는 최소한의 개혁은 거부했다. 난은 진압되어야 했고 정봉준은 교살되어야 했다.

 

일제의 부역 자손들은 지금도 한국 땅에서 버젓이 살아가고 있다.

반민족행위자 처벌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한국 정치의 정통을 없고 다시 미일의 틈바구니에서 신음하고 있다. 조선이여....

 

 

▲ 1945년 평안도 전도, 내 아버지 고향은 105인 사건과 조선 기독교 발응지인 평안북도 선천이다. 선천상업고등학교에 다니시었다.  © 성남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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